둘레길: 서울 성곽길3구간(남대문-창의문)
걷기일시: 2015년 02.28.토요일
누구랑: 발길따라도보여행 회원 12명
걷기 경로: 회현역-남대문시장-숭례문- 배제공원-정동극장-돈의문터-경교장-홍난파가옥-종로문화센터-인왕산 성곽길-윤동주시인의언덕-최규식동상 - 서촌 -경복궁역
(약 14km 5 시간30분)
발길따라 도보여행 카페에 가입하고도 꾀 많은 시간이 흘렀다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 피일 하다 마음 먹고 2월 마지막날 서울 성곽길 3구간을 걷는데 참여하기로 한다
그동안 1,2 구간은 나혼자 다녀 왔는데 많은 명소를 놓치는 바람에 못내 아쉬었는데
발길방 카페는 사전 준비가 철저하기 때문에 두루 두루 빼먹지 않고 다닐수 있는 장점도 있고 해서 .......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몇분 계시니 그렇게 낯설지는 않는 카페이다
회현역 5번 출구 에서 10시 정각에 모인다
카페지기님이신 홍아님 보라님 , 마틸다님과 산조아님, 가을들녁님, 비너스님 은 익히 일면식도 있고 닉고 기억하는데
무학님, 희망새님,송이님, 올리버님, 하늘빛님은 처음 소개 받는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남대문 지하 상가를 통해 남대문 시장 쪽으로 출발한다
남대문 시장은 빠르게 통과
남대문 차도로 나오면 제일 먼저 주목하게되는 조선 통신사의 길 비이다
이것 무심코지나 치게 되는데 오늘의 리딩 마틸다님한테는 않 통한다
자료를 찾아본다
우리 나라에서 일본으로 조선 통신사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1429년 세종 때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왜구가 우리 나라에 출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통제를 요청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일본의 정세를 살피는
역할과 바쿠후 쇼군(실질적이 나랏일을 맡고 있던 장군)이 즉위할 때 축하 사절로서의 성격을 띄기 시작했단다.
임진왜란으로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조선통신사를 파견이 끊어졌다가 포로 송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1607년부터 부활, 11년까지 총 12회에 걸쳐 우리 나라에서 1811년까지 13번의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외교사절로 파견했단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가 한 번 올 때 움직이는 인원이 300-500명 정도였단다
아래 그림은 조선 통신사가 다녔던 여행로 이다
대마도 이즈하라는 올 봄에 가 볼 기회가 있을것 같다
도로를 횡단하기위해 건널목으로 향한다
도로 횡단시에도 이 서울 성곽길이라는 표시를 잘 보고 다녀야 한다
남대문로를 가로질러 간다
도로를 횡단하면 숭례문 밖에 위치 했다는 남지라는 연못터
남지터에는 아래와 같은 역사적 깊은 뜻이 있다 (펴온글)
풍수적 관점에서 보면 남쪽 방위는 오행(五行) 가운데 화(火)에 해당하는데,
조선왕조실록 및 청동용두의 귀 등 옛 문헌 기록에 의하면 조선 시대 한양의 지세(地勢)를 풍수적 관점에서 보고 남쪽에 위치한 관악산의 형상이 웅장하여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아, 이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여러 가지 비보(秘報) 장치를 둔 것으로 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남쪽의 대문인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워 쓴 것인데,
‘숭(崇)’자가 마치 불꽃과 같기 때문으로, ‘불로써 불을 막기 위한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또한 조선 시대부터 일제 강점기 직전까지 숭례문 앞에 있던
‘남지(南池)’ 역시 이러한 비보 장치로 보는 견해도 있다.
물론 성문 앞에 있는 연못은 화재 시에 방화수(防火水) 기능을 겸하고 있다.
남지터에서 발견된 청동거북의 모습
희망새님 인증
승례문으로 연결되는 철거된 성곽 대신 영속성을 가지기 위해 복원한 부분인데 어찌 좀 거시기 하다
이 성곽 돌은 그래도 괜찮네
jtbc에서 요즘 인기 있는 mc전현무의 비정상회담 광고 간판
평안 교회와 인현왕후 탄생지인 수렛골 터
수렛골 또는 추모동에서 태어나 숙종의 계비가 된 인현왕후로 그유명한 장희빈과 대립각을 세운 그왕비임
배재공원으로 들어간다
배재학당 건물(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1885년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고등교육기관이었던 배재학당에서 이루어진 교육과정과 아펜젤러의 교육이념 그리고 우리나라 근대기에 이루어진 교육, 종교, 문화, 정치, 외교 등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설립되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2008년 7월 24일 배재학당 동관에서 개관하였다. 배재학당 동관은 1914년 5월에 착공,
1916년 3월에 준공되어 현재까지 원래의 모습 그대로 지키고 있는 붉은색 벽돌 건물로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6호이다.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각층은 316.68㎡(95.79평)이고 3층은 다락층으로 연면적이 1,194.59㎡(361.33평)에 이른다.
이 건물은 아펜젤러 홀이라고 불리었을 정도로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 교사였던 배재학당 당사(1887년 준공)가 소실된 이후 배재학당을 상징하는 실체이다.
정동제일교회
1887년 10월 9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에 의하여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창설자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그 해 8월 3일에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한국의 근대교육을 창시하고,
또한 이를 보급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종교행사를 하였으나,
전적으로 예배만을 볼 수 있는 교회용 건물을 구입해 이를 수리하고 교회이름을 베델예배당(Bethel Chapel)이라고 부르고 10월 9일 첫 예배를 보았다.
이 교회는 초창기부터 그 옆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梨花學堂)이 있어 학생들이 그 교회의 중요 회원이 되어 개화운동의 한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배재학당장까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청년회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서재필(徐載弼)이 오랜 동안의 미국 망명생활로부터 귀국하여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면서 정동교회청년회를 중심으로 협성회를 조직하여
독립협회의 전위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협성회는 정동교회청년회의 노병선(盧炳善)·이승만(李承晩)·신흥우(申興雨) 등이 주도하였다.
1894년에는 교인수가 200명을 넘어섰기 때문에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1895년 9월에 착공하여 1897년 12월 26일에 봉헌식을 가졌다.
이 건물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세기 교회건물이다.
덕수궁 돌담길로 잠시 가본다
장독대의 키가 참 앙증스럽다
덕수궁 돌담길을 같이 걸으면 헤어 진다는데
이것은 옛날 덕수궁 옆에 대법원이 있어 이길을 걷다가 법원으로 가 이혼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진송남의 덕수궁 돌담길
비 내리는 덕수궁 돌담장 길을
우산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
무슨사연 있길래 혼자 거닐까
저토록 비를맞고 혼자 거닐까
밤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밤에.
밤도깊은 덕수궁 돌담장 길을
비를맞고 말없이 거니는 사람
옛날에는 두 사람 거닐던 길을
지금은 어이해서 혼자 거닐까
밤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밤에
정동극장이다
정동극장(貞洞劇場)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圓覺社)를 복원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탄생한 극장으로,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생활 속의 문화운동 전개, 청소년 문화의 육성이라는 세 가지 지표를 목적으로 1995년에 건립되었다.
개관 당시에는 국립극장 분관으로 출발했다가, 1996년 과도기 운영체제인 사단법인체로 변경하였으며,
1997년 재단법인으로 완전한 독립법인체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대문화유산인 신화일보 사옥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에서 이병헌과 요절한 이은주가 처음 만난 곳이란다
케나다 대사관
보호수인 희화나무로 수렬이 550년 되었고 높이가 17m 516cm 둘레이다
돈의문터 이다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즉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평면 규모나 구조상의 특징은 알 수 없다.
다만 지붕 위에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鷲頭 : 망새)·용두(龍頭)·잡상(雜像)·선인 등을 배열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이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 때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關門)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인데, 일본인들에 의해 함부로 철거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1890년 당시의 돈의문
잘못하면 지나칠 우려가 있는데 이곳은 강북 삼성병원 속에 있다 경교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산실 경교장으로 김구 주석의 숙소
김구 주석의 마지막 입었던 옷
눈덮힌 들판을 걸어갈때는
발걸음을 어지 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나의 발자욱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2층 안두희 소위가 쏜 총탄을 맞은 그곳
안두희의 총알 자국이 창문에 남아 있다
경교장에서 나와 월암 공원으로 햔한다
이곳 부터는 한양 도성이 제 모습을 다시 갖추었다
강북 기상청
이제 가까이 인왕산 뚜렸이 보인다
홍난파 가옥
본명은 영후(永厚). 홍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마을 글방에서 한학을 배웠고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수업을 했다.
1918년 일본에 유학하여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입학했다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했다.
3·1운동 후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다시 귀국했다. 그는 도쿄[東京] 유학시절 비록 일본에서 발간한 것이지만 〈삼광〉이라는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를 발간했다. 귀국 후 매일신문사에서 기자생활도 했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1920년 4월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애수〉라는 곡의 악보를 그의 단편소설집 〈처녀혼〉의 끝에 실었는데,
1925년 김형준에게 노랫말을 부탁하여 지은 노래가 〈봉선화〉이다.
1941년 늑막염이 재발하여 경성요양원에서 죽었다.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 1968년 수원 팔달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 건립, 1969년 난파음악상이 제정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바이올린 곡 〈애수의 조선〉·〈로만스〉·〈여름밤의 별들〉·〈라단조 가보테〉·〈동양풍 무곡〉, 가곡 〈성불사의 밤〉·〈사랑〉·〈금강에 살으리랐다〉, 동요 〈병아리〉·〈고향의 봄〉·〈개나리〉·〈할미꽃〉 등이 있다. 또한 〈음악일화〉·〈동서음악의 비교〉·〈조선문화 20년〉 등의 평론과 〈서울 계신 K형께〉·〈첫 무대의 기억〉·〈악단의 뒤에서〉 등의 수필, 〈최후의 악수〉·〈처녀혼〉 등의 소설도 썼다.
또한 홍난파의 대표곡인 〈봉선화〉를 비롯해 그가 작곡했다는 여러 곡들이 친일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어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중구 문화 센터에서 잠시 휴식및 화장실을 다녀 오고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산성의 산행을 시작한다
이정표를 확인 하고 우리의 갈길을 미리 눈여겨 본다
인왕산의 화강암 거므튀튀한 바위가 조금 무섭고 을씨년 스럽게 보인다
힘들지만 질서 정연하게 비탈길 계단을 따라 올라 오는 회원님 들
오늘 처음 발길따라 도보 여행 프랭카드를 펼치고 사진을 찍어본다
닉을 외기 위해
좌로부터 리딩자 마틸다님, 카페지기 홍아님, 산조아님, 하늘빛님, 가을들녁님, 보라님, 비니스님, 송이님, 올리버님희말새님, 무학님
때 사진을 찍고 이왕 쉬는 바엔 즐거운 간식 타임을 갖도록 하고 자릴 잡는다
파랑새님의 매생이 굴떡꾹
산조아님의 쏨씨 발휘
우리 아내의 계란말이
송이님의 순수 자연산 수제 도토리묵 산조아님의 오징어 야채 말이와 함께 오늘의 인기 메뉴
배속을 충분히 채웠으니 우리의 길을 다시 간다
도성 밖의 선바위
몇년전 아내같이 음침한 날씨에 이곳으로 올랐다 무서워 혼났던 기억이 난다 ........................
저건 두꺼비 바위? 아마 정식 명칭이 범바위 인가보다
인왕산에서 바로 저방향은 찰영이 금지 되었는데 찍고 보니 하나 찍혔네 .......................
오르고 내려가고
인왕산을 휘감아도는 아름다운 성곽의 자태가 뱀 형상을 보여준다
정상 전에 아름다운 발길방 처자들만 모여서 비너스님은 어디에?
고추들도 섞어서
정상 마지막 힘을 써야 하는 구간
모두들 잘들 따라 올라 간다
정상은 별도의 정상석은 없고 다만 지리 경도 위도 표시가 있다
멀리 북한산 보현봉이 보인다
나려가는 곳도 악간 위험 구간
10여분 줄골 내려가 인왕산 구간 하부 쉼터에서 생강차로 피로를 풀어본다
앙증스러운 몽키 바나나 옆 입은 누구?
인왕산 산성 구간을 마무리 한다
이곳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은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사료된다는 견해가 있고
또한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본식 창씨개명은 히라누마 도슈(平沼東柱)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죽는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전 부끄럼 없기를 이라고 시작 하는 서시 시비
내부 촬영금지로 사진 자료 없다
윤동주시인의 언덕에서 내려와 최규식 경관의 추모탑으로 해서 청와대 사랑채로 향한다
최규식경관
1968년 1.21.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때 북한산에서 은신하고 있다 cic 방첩대 행세를 하면서
청와대 쪽으로 내려오다 당시 종로 경찰서장인 최규식 경관이 이를 적극 저지하다 순직한 분이다
자하문 고개
이곳에서 요즘 한창 뜨는 서촌의 발길방 기록은 따로 ...................... 이곳 쿡 누르면 http://blog.daum.net/ojyouk/8492052
발길따라 도보여행 카페에서 펴온 내 사진 몇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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