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

[보은여행] 신혼여행의 추억이 있는 속리산 법주사 돌아 보기

실을1 2014. 12. 15. 11:25

 

 

전북대 106 ROTC 15기 송년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 오는 길에 대전 딸네집에 방문하였다

신혼 여행의 추억이 있는 속리산 법주사로  잠시 짬을 내 바람 쐬려 간다

 

법주사 입구에 위치한 정이품 송을 잠시 둘러 본다  

천재지변으로 옛날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8백년의 세월을 견디고 꿋꿋하게 속리산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의연하다  

 

 

 

조선조 세조 께서 속리산을 방문하려하니 임금님의 가마(연)가 나무에 걸리려 하자

스스로 기지를 올려 주고 나중엔 비를 피하도록 해준 공으로 정이품을

하사 받은 소나무의  일화를 잠시 읽어본다

그 당시 정이품송에서 찍은 사진이 한장 남이 있네 ㅋㅋㅋ

 

 

 

일주문을 자나

금강문을 통과하고

천왕문을 넘어 경내로 집입한다

당간지주

그유명한 팔상전

국보 제55호. 5층의 옥개는 네모지붕이며 그 위에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1968년 해체 중수할 때 5층 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고 심초석(心礎石)에서 사리장치와 함께 동판에 새긴 글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팔상전은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1605년에 재건하고 1626년에 중수했다고 한다.

 건물은 2단의 석조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의 각 면 중앙에는 돌계단이 있다.

 건물의 평면은 정사각형이며 건물의 외관은 층이 높아지면서 주간(柱間)의 수가 줄어들어 강한 체감(遞減)을 보이는데

 1·2층은 5칸, 3·4층은 3칸, 5층은 2칸이다.

 공포의 짜임은 금산사 미륵전이나 쌍봉사 대웅전에서 볼 수 없었던 특수한 방식으로 1층은 주심포식(柱心包式)이지만 2층 이상은 다포식(多包式)이다.

 1층은 기둥머리에 창방을 돌리고 공포의 헛첨차는 기둥머리에 꽂혔으며 공포의 구성은 주심포식 2출목인데, 첨차는 조선 말기의 매우 장식적인 파련각(波蓮刻)으로 장식되어 있다. 2, 3, 4층의 공포는 모두 기둥 위에만 있으나 다포식 구성에 속하며, 5층은 기둥머리와 창방 위에 평방을 돌린 완전한 다포식이다.

 내부 가구(架構)는 다층구조의 일반적 기법을 따라 5층 건물 전체를 통과하는 심주(心柱)가 중앙에 있으며 네 모서리 안쪽에 귀고주[隅高柱]를 세웠다.

 2층의 우주는 1층 우주와 귀고주를 연결한 퇴보[退樑] 위에 세워졌다.

3층 역시 2층과 같은 형식으로 기둥을 세웠으며 4층은 귀고주가 바로 4층의 우주로 되어 있다.

 이 귀고주는 심주와 대들보[大樑]로 연결되며 5층 우주는 이 대들보 위에 세워졌다.

 심주는 기단 윗면의 심초 위에서 5층 옥개 밑 중도리까지 이른다.

 이 건물에는 심주의 4면에 각 2폭씩 8폭의 팔상도(八相圖)가 있고 그 앞으로 4면에 열반상을 포함한 삼존불상을 각각 배치했으며 이어서 3열로 천불상을 봉안했다.

이 건물은 1968년 해체·조사된 바로는 각 층마다 구조가 다르고, 재목의 사용이나 공포구성법·체감률 등 건축법식면에서도 무질서하고 혼란해 부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5층목탑으로서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다.

(→ 목탑) 즉 17세기에 건축된 목탑이지만 부분적으로 고대 목탑을 복원하는데 고찰할 수 있는 자료이며,

 건축법에 있어서도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화롭게 통일시킨 건축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법주사(백과사전에서 펴온글)

사적 제50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

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철확(鐵鑊: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

 

대웅보전

 

 

 

 

 

 

 

 

마애여래좌상

보물216호인 이좌상은 높이가 6m정도 되는 돌에 세겨진 미륵불상이다

 

 

 

 

35년전  아내와 신혼여행때 다녀 왔던 관광호텔이였는데 ..............   그때 생각이 새록 새록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