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걷기

[옥천여행]장계국민관광지와 정지용의 향수30리길

실을1 2014. 9. 11. 12:15

 

옥천여행에서 빠지면  않되는  곳이 장계국민 관광지와 시인 정지용의 향수 30리길이란다  

우리에게는 이동원의 향수라는 노래로 아주 잘 알려진  

넓은벌 동쪽 끝으로 .........  라고 시작하는 그런노래

 

이곳에는 향수30리길이라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시작은 주차장에서부터  전면으로 보이는 건물은 향토 전시관이다

오늘 탐방은 모단가게에서 좌로 돌아가 1코스 2코스 3 코스 카페 프란스를 돌아 원점으로 회귀한다 

 

출발지 모단가게

 

모단가게는 장계국민관광지 내에 위치한 테마가 있는 휴게소입니다.

관광객들이 편하게 앉아서 쉴수 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조그맣게 북카페가 준비되어 있어 편하게 앉아서 독서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또한, 소공예품 공방체험도 할 수 있으며 판매도 합니다.

 이곳은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투명 유리관으로 되어 있으며 외부와 내부는 마치 조형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풍깁니다.

 특히나 가게 외부의 투명유리관에는 정지용의 시로 덮혀 있어 특색있는 모습입니다.

모단가게의 우측으로는 시간여행이라 하여 과거의, 미래의 나에게 쓰는 편지와 더불어 다른 사람에게도 편지를 쓸 수있어 재미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자 이제 시비가 즐비한 정지용의 향수를 흠뻑 느끼기 위해 출발 한다

 

 

 

대청호 상류의 호수가 펼쳐저 가는 걸음을 시원하게 트이게 해주기도 한다  

 

 

얼룩배기 황소가 금방이라도 음메 하고 울을것 같은 길이 이여 진다  

백학봉 시비

 

 

 

 

향수 바람길이라 명명 되어 있다

 

나-ㄹ 눈감기고 숨의십쇼 . 잣나무 알밤나무 안고 들으시면  나는 샅샅이 찿아보시오: 숨ㅅ 기내기에서

 

 

 

돌아가는길: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분

지금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하늘의 그물 : 정호승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 나기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 둘 때지어 빠저 나갑니다

 

 

 

 

 

세한도 가는 길

 

서리덮힌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 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천명이 일러주는 세한행 그 길이다

.....................................

.....................................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옥 자옥 붉게 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카페 프란스에 위치한 리사이클 동물원 이다

자원의 고갈과 오염 파괴 등의 환경 오염 속에 환경 친화적 화두에 걸맞는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지용

 

1902. 5. 15 충북 옥천~ ?

시인.

아명은 지용(池龍).

한의사인 아버지 태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도쿄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멋진신세계는 정지용의 시정세계를 공간적으로 해석한 공공예술 프로젝트입니다.

 문화 예술을 통한 지역재생 및 농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새로운 모색을 위해 실행되었으며,

 “향수30리-멋진신세계”라는 옥천의 멋진 문화예술브랜드로 재탄생시켰습니다.

“멋진신세계”는 충북 옥천의 구읍에서 장계관광지를 잇는 아트벨트 30리길을 이르는 말이며,

 이미 오래되고 방치되어 사람들에게 잊혀진 장계관광지의 새로운 이름이기도 합니다.

옥천은 한국 최초의 모더니즘 시인 정지용의 고향이며, 아름다운 금강을 품고 있습니다.

 이곳에 시인의 감각적 詩작품과 금강을 주제로 건축가, 디자이너, 아티스트, 문학인등 100여명이 참여하여

 2년여의 시간을 함께한 결과로 주민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의 풍경인 “멋진신세계”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시설 대부분이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지 않아 넝쿨과 칙칙한 잡목과 풀로 뒤범벅되어 큰 길을 제외하고는 접근이 어렵다

지자체에서 우후죽순 처럼 개발하는 것은 좋으나 적극적인 홍보도 필요하고 관리되어 하며   일반인들이  많이 방문해서

이런 추한 모습이 되지 않도록 해야될 것 같다   

 

 

 

 

 

 

 

 

 

 

 

 

 

 

 

 

 

 

 

http://www.youtube.com/watch?v=eWIxclVd1_s&feature=player_embedded

향 수(鄕 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거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옯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