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

종묘 역사 여행

실을1 2016. 11. 21. 19:37



종 묘


조선 왕조 역대 왕과 왕후는 사후에 그 신주를  봉안한 종묘는 .

유교 사회에서는 왕이 나라를 세우고 궁실(宮室)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종묘와 사직(社稷)을 세워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며

경천애지사상(敬天愛地思想)을 만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천지 신명에게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왕이 도읍을 정하면 궁전 왼편에 종묘를 세우고 오른편에 사직을 세우게 하였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는 1394년(태조 3) 8월 종묘 터를 보았고,

 9월 감산(坎山)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한 그 곳에 종묘 터를 결정하였다.

 12월부터 영건(營建)을 시작해 다음해 9월에 일차 영건이 끝났으며,

 그 뒤 1546년(명종 1)까지 계속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자, 1604년(선조 37)부터 중건이 논의되어,

 선조 41년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는 등 공사를 개시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던 해인 1608년 5월 중건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개수와 증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정전은 국보 제227호, 영녕전은 보물 제821호로 지정되었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

외대문과 , 종묘의 건물은 현판이 없단다

  아무런 건물명이 없다 이것은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고 왕과 동궁 그리고 몇몇 시하들만이 드나드는 곳이므로  굳이 현판을 달 필요가 없다

종묘는 토요일을 제외 하고 나머지는 시간제로 탐방미 가능하다

문화재 해설사의 인솔하에  약 1시간 정도 단체로 관람을 해야 하고 입장료는 1,000원임


정해진 시간을 기다리다  정문앞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을 찍어보며 약 20분 기다림

기다리는데  앉을 의자도 없고 ....     



드디어 한국어 해설사를 따라 입장

오늘 우리를 안내할 문화재 해설사


종묘 전경




지당


망뫼루

향대청 남쪽에 위치하는 망묘루는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

향대청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지당(池塘)이 있고, 그 동쪽으로 망묘루, 공민왕 신당, 향대청 일곽이 있다.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香祝幣)등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祭享)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종묘 제례악(펴온글: 문화재청) 


  • 종묘제례 및 제례악은 2001년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 2008년부터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관리되고 있다.

  •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에서 개최되는 행사로 유형과 무형의 세계유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문화유산이다.
  •  종묘제례는 왕조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로 조선왕조의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 한다.
  • 조선조에는 춘하추동 사계절과 섣달에 행하였으며 1969년 대동종약원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은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봉행되고 있다.

  • 종묘대제에는 종묘제례가 봉행되며 각 제사의례에 맞추어 경건한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음악과 무용으로서 종묘제례악이 따른다
  • . 제례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迎神禮), 초헌, 아헌, 종헌례에 이어 음복례가 행해지고,
  •  신을 보내 드리는 송신례(送神禮)를 갖춘 후에 축(祝)과 폐(幣)를 망료(望燎) 위에 불사르는 것으로 끝난다.
  • 종묘제례악은 우리 고유의 음률로 왕조의 창업과 기상을 노래하고 있으며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추어 춤과 음악이 조화를 이룬다.
  •  엄숙한 제사 의례만큼이나 장엄미가 돋보이는 종합예술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크며 동양에서도 드물게 남아 있는 고전음악이다.

  • 재공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어목욕청(왕이 목욕하는 건물)이 있다.


    어목욕청

    요샛말로  방화수(소화기 이지요)








    전사청


    전사청은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으로,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에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으로 꾸몄다.





    정전

    광각렌즈 17mm 로  전체를 잡아본다

    정 전


     정전에는 현재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를 모셔놓고 있다.

    정전의 신실은 서쪽을 상(上)으로 해 제1실에 태조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종묘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

     신실 양 옆으로 각각 두 칸의 협실,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문인 신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가 넓게 펼쳐있고,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으며,

    그 북쪽 끝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종묘 건축이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은 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길게 늘린 점에 있다.







    영녕전


    정전 서쪽에 있는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그리고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16실에 모셔 놓고 있다

    영녕전은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정중(正中)에 추존조사왕(追尊祖四王)을 모시고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 서쪽을 상으로 차례대로 모시고 있다.

     이것을 소목 제도(昭穆制度 : 신주를 모시는 차례로, 왼편을 昭, 오른편을 穆이라 하며, 天子는 1세를 가운데 모시고 2·4·6세를 소에, 3·5·7세를 목에 모시는 제도)라 한다.


    영녕전은 신실 하나하나의 구성은 정전과 크게 다름이 없지만 부재의 크기가 정전보다 약간 작고 전체 건물 규모도 정전보다 작기 때문에

     정전에서와 같은 장대함을 느끼기에는 뒤지는 감이 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공간이 한눈에 쉽게 들어와 친근감을 더해 준다.
    네모난 아랫부분에 원형 주좌를 둔 주춧돌에 둥근 기둥과 간단한 초각을 한 익공을 짜고,

    퇴칸 안에 두 짝 판문을 달고 뒤는 화방벽으로 쌓고 서까래는 부연 없는 홑처마로 꾸미는 등 세부 구성은 정전과 거의 같으며

     역시 부재 표면도 단청 없이 간단히 주칠로 마감하였다.

    좌우 익실 앞으로 동·서월랑이 뻗어 나와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고 박석을 덮은 상·하월대가 울타리를 가득 메우는 점도 정전과 동일하다.

     이곳은 부재의 처리나 건물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종묘 정전보다는 작지만 건축 공간 자체의 장엄한 공간 구성은 여기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친근감 있는 장인들의 솜씨는 이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