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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를 보고

실을1 2016. 8. 8. 17:28


휴일이지만

폭염에  산이나 둘레길 걸어 보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아  집  앞뒤 창을 활짝 열어 놓지만  더위를  멈추게할 수가 없다

이럴땐 냉방이 빵빵한  극장으로 가는게 가장 현명할게다

 '부산행'을 볼까 했는데  둘째 딸아이가  보지 말란다

좀비 영화라던가? 

그럼 인천 상륙작전?  이것 저것  고르다  덕헤 옹주로  결정하고 아내도  OK 란다


집에  권비영의 장편소설 "덕혜옹주"는 작년 6월 대마도 여행 가기전  읽어 봤는데   


소설도 실존인물을 주연으로 한 픽션이고 

이영화도 픽선이니  당연히 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


  


출연진


이건 덕혜옹주의 실제  삶의  이야기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

덕헤옹주는

고종이  양귀인에게서 환갑때 낳은  옹주로

무척 이뻐했단다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

닥헤옹주의 어머니  양귀인

덕헤옹주가 일본으로 강제로 보내질때  고종의 독살설을  믿고 있던 양귀인은

보온병을 주어  남을 절대 믿지 말고 그속의 물만 먹으라고 당부한다

실제로 일본에서  덕헤옹주는 그 보온병의 물만 먹었다고 한다   

친일파 한택수

어릴때부터  덕혜를 못살게 괴롭혔고

일본 황실의 명령이라고 일본에 보낸 장본이고 

극중  간악하고 몸서리치게 덕혜를 괴롭힌다  


한택수 역에  윤제문 씨가 맏아 열연하였는데   가상 인물이나  실제 역사속에서 찾아 보면

한창수 라는 인물과 싱크로율이 99% 


창수(韓昌洙)

, 1862년 1월 19일 ~ 1933년 10월 7일)는 조선 말기의 관료 겸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으로, 본관은 청주이며 자는 경문(景文), 호는 영애(穎愛)이다

한성부 출신이다. 대제학을 지낸 한장석의 아들로 태어나 한윤석에게 입적되었다.

1888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에서 주로 벼슬을 하였으며, 1895년에는 한성재판소의 판사를 맡기도 했다. 외국어에 능통하여 관립한성외국어학교, 한성사범학교의 교장직과 함께 유럽 지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바도 있었다.

외교 관계 쪽 관직을 맡으며 일본에 드나들면서 친일 세력과 가까워진 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의 신임을 받아 고종순종 등 왕실을 전담하는 이왕직 장관도 역임했다.

한창수는 거침 없이 친일적 언행에 더하여, 이왕직 장관을 지내면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를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 보내고 일본인과 강제로 결혼하게 하여 결국 정신병을 앓게 한 일로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한창수가 이왕직 장시국장 재직 중 고종이 사망했는데, 고종 독살설이완용, 이기용, 윤덕영, 한상학, 그리고 어의 안상호 등과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권세를 이용한 치부에 능숙하여 일제 강점기 동안 귀족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게 살았으며, 1960년 보도에 따르면 손자가 서울 성북구에서 유복하게 살고 있었다.





시녀 복순역에   요즘 한창 뜨는  팔방미인  라미란

극중에는  일본 까지 따라 가는데  실제로는  덕혜옹주  단신으로  일본에 갔단다  




극중 또다른 주인공 김장한 역의 박해일

어릴때 고종이  부마로 점찍어 놓왔는데

유치원 친구  김장한


입본에서 일본 육사를 2듣으로 졸업 하고 임관하여

이왕실 호위군관으로 만난 김장한

그러나 실제로는  지하 독립운동가의 일원이다  



비운의 덕혜옹주 이복 오빠   영친왕

가상의  독립운동가로 분한 안내상

영친왕과 비전하(이방자여사)를 상해로 망명을 추진하고

이때 덕헤옹주로 같이 대려가가로 한다  

김장한을 돕는  복동

이유 왕자로 분한  고수

그도 일본에 끌려 와서   극중에  독립운동을 하는 걸로  연기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일본을 찬양하지는  않았지만  독립을 위해서 한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나중  동경 대진  때  사망하였다       

쇼다케유키

덕혜옹주의 일본인 남편

고종과 순종의  실제 사진

극중 사진과 비슷하다 ㅋㅋㅋ  우측이 덕혜








덕혜 옹주와  딸 마사에  해방이 되어 한국으로 가려하나  갈수 없다

 



해방후에 이승만 정부는   조선왕가의 부활을  두려워하여

조선 왕가의 복원을  하지 못하게 하고  그 일환으로  덕혜 옹주의 귀국을  막아 왔는데

박정희 군사정권 때에   신문기자가 된 김장한의 도음으로 

극적으로   귀국하여  낙선재에서 이방자 여사와 같이 생활하다  1989년 쓸쓸히 그생을 마감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김장한의 여동생과 유치원에 같이 다녔고   김장한의 형이 신문기자였는데    그 분의 노력으로  귀국하게 된다)      


일반인  이였다면

해방후  고국 대한민국으로 돌아 오는데  그토옥 험난하지 않았을 것인데

조선의 왕가의 옹주라는 신분이였기에  정부와 사람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만다

영화 관람 내내  무언가  계속 가슴속에 뭉클한 감정이  자꾸 솟구쳐 눈시울을  적시였다

손에진의 연기와 또하나의 주인공 박해일의  청년시절의 기백, 그리고  노년시절 부상으로 다리를 절면서도

덕헤옹주를 찾아 고국에 오도록 하는 중후한 연기가  오래도록  내 머리속에 잔상으로 남아 있다

 

어느  블로그에  있는  글을 켑쳐하여 실어본다

그냥 이글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긍이  가는 글귀가 있어............      




역사의 희생양인  덕혜, 그리고  망한 조선왕조

영화의 마지막  나레이션은 이렇게 말한다

" 나는  백성을 위해  한것이 아무것도 없다"      


올여름 뜨거운  폭염이 계속되는데

시원한 극장에서  두시간  덕헤에 푹 빠져 봄이 어떨실런지 .................   






2015년 6월  대마도 여행때 가본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  실제 사진   


덕혜옹주결혼 봉축기념비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쓰시마 번주 소 타케유키(宗 武志)백작과 정략 결혼하였다.

 이 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쓰시마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正惠가 있었으나 딸도 어려서 일찍 죽고 본인도 정신병에  시달리고 ..... 

힘든 생활을 하다  

 1955년 이혼 후 고국으로 돌아 오려 했으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씨  왕조가 복원되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귀국을 허락하지 않다가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인 1961년에 귀국한 덕혜옹주는

이방자 여사와 같이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다가 별세하였다.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