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일본여행]대마도 여행 2일차 덕혜옹주의 숨결이 깃든 이즈하라 시내 도보여행

실을1 2015. 5. 18. 14:08

 

대마도 번주 소 가의 카가네이시 성곽의 일부와 성문인  야쿠라문

 

 

 

 

대야호텔에서 아침을 먹고9시 오늘 아침은 시내 도보 여행이다  

카네이시 성곽과 성문 앞에서  오늘아침  여행을 시작한다

문양은 아마 벚꽃인가?

대마 시청

먼저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로 향한다

 

 

 

 

 

 

덕헤옹주결혼 봉축기념비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쓰시마 번주 소 타케유키(宗 武志)백작과 정략 결혼하였다.

 이 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쓰시마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正惠가 있었으나 딸도 어려서 일찍 죽고 본인도 정신병에  시달리고 ..... 

힘든 생활을 하다  

 1955년 이혼 후 고국으로 돌아 오려 했으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씨  왕조가 복원되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귀국을 허락하지 않다가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인 1961년에 귀국한 덕혜옹주는

이방자 여사와 같이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다가 별세하였다.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다.

 

햇살이 뜨겁게 비춰 우리는 그늘로 숨어들어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비운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곽가이드님  

 

버려진 자동차가 깨끗한 질서의 일본의 다른 면을 보게되었다

 

 

대마도 현립 박물관인데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

아무런 자료는 없다

 쓰시마 군립 박물과 좌측엔 2개의 비가 있는데  맨 좌측은 조선통신사비이고  우측엔 2차 대전때 침몰한 군함 주환호와 타고 있던 희생자를 추모하는비이다

주환 호 추모비의 글

조선통신사비

대마도 번주로 부임하여 조선 왜관에서 3년간 한국과 한국어를 배우고 간

 아이메노모리호슈 의 평소 지론으로  한국과 일본의 외교는 " 성실과 신의로 대하여야 한다고

가르친 이분을 기리는 비이다

노태우 대통령도 일본을 방문하여 이와 같은 말을하기도 했단다

이분은 대마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켰는데 이것이 일본의 소학교의 기원이 되었다 한다   

가는길마다 도리이가 곳곳에 있다

깨끗한 거리를 걸으며  ...... 이런 하수도랑에  잉어가 자라고 있다

 

 

 

 

이제 우리는 8번궁신사를 포함 3개의 신사가 나란이 있는 곳이다

 

의병 활동을 했던 최익현 선생이 처음 구금 되기도 했던  8번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우리들  표정들이 진지 하다

주말이면 한국관광객으로 가득한  대마도 

마치 요즘 한국에서 중국인들로 유명 관광지가 분비는 것과 같다  

 

이곳  8번궁(하찌만구)신사는 일본 한자들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우리나라 삼한을 정복하고 임나 일본부를 세웠다는

신공왕후라는  가상의 인물을 모시는 곳이라는데   역사 왜곡의 극치인 신사이다

 

 

 

 

똑순이님이 신을 불러 본다

이 신사를 봉축한 분들의 이름과 금액이 적혀져 있다

백제 왕인박사 후손을 기리는 신사

6명이 둘러싸보니 겨우 연결되었다

임진왜란의 일본 장수 소서행장(코시에유카나라)의 딸  천주교인 이였는데 그의 세례명  마리아를 기리는 신사도 있단다

 

 

 

앙증 맞은 1톤 트럭 앞에서

이 밖에 가볼만한것으로 의병장 이였던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로 끌려와 그의 희생을 기린 수선사(슈젠지)도 있다는데 우리는 시간 관계상 못가본다

 

곽현경 가이드가 들려주는 일본 역사중  3대 사무리이에 대한 이야기 를 많이한다

울지 않는 새는 죽여버린다는 오다노부나까(직전신장)

울지않는 새는 울도록 만든다는 토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

울지 않는 새는 울때 까지 가다린다는 도꾸가와이에아스(덕천가강)

 

일본여행에서 약방의감초 같이 나오는 이 3대 사무라이 영웅에대해  좀더 알라보려  인더넷 검색을 해본다

 

일본의 사무라이 3대 영웅

 

일본 봉건시대의 무사(武士)를 사무라이라고 한다.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본래 귀인(貴人)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이를 경호하는 사람을 일컬었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이후 무사계급이 발달하여 셋칸케[攝關家 :섭정과 관백벼슬을 하는 가문]와 잉[院] 등에서 경호를 위해 무사를 채용하게 되자,

점차 사무라이의 명칭이 무사 일반을 가리키게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법[鎌倉幕府法]에서는 낭당(郞黨)을 거느리고 기승(騎乘)의 자격이 있는 무사를 일컬었고,

형벌도 낭당과 일반서민과는 구별되었다.

무로마치[室町]시대에 있어서도 대체로 상급무사를 지칭하였는데,

 에도[江戶]시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신분이 고정되어, 그 가운데 사(士)에 속하는 자를 일반적으로 이렇게 칭하였다.

그러나 무가사회 내부에서는 보다 엄격하게 이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막신(幕臣) 중에서는 하타모토(旗本:에도시대 將軍家 직속으로 만석 이하의 무사)를 가리켰으며,

 가치[徒]와 주겐[中間:무가의 고용인] 등의 하급무사와는 구별하였고,

 제번(諸藩)의 가신 중에서도 주고쇼[中小姓:무사 직위의 하나] 이상의 무사를 이렇게 간주하는 등, 무사 중에서도 비교적 상층계급을 사무라이라고 하였다. 또한 무가(武家)를 주군(主君)으로 섬기지 않는 특수한 사무라이로 궁가(宮家)에 봉사하는 미야사무라이[宮侍],

몬제키[門跡:격이 높은 사원]에 봉사하는 데라사무라이[寺侍] 등이 있었다.

 

활약이 뛰어났던 사무라이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 출생.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하였다가,

다조대신[太政大臣], 간파쿠[關白]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고 혼노사[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그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가 취한 최초의 행동은 그때까지 되풀이되던 왜구의 노략질을 국가적 규모로 확대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나고야[名古屋]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로 하여금 1만 8,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하게 하였다.

 조선은 처음에 패배하였으나 전열을 정비한 관군과 의병 및 수군의 활약으로 왜구를 모두 퇴각시켰다.

이 전란으로 조선은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노략질 당했고,

조선의 도공(陶工)을 납치한 일본은 도자기 문화를 이룩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아명 다케치요[竹千代].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장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동맹을 맺고 그의 힘을 빌려 스루가[駿河] ·도토미[遠江] ·미카와를 영유함으로써 동해 지방에 일대세력을 구축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1603년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에서 그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패자(覇者)로서의 지위를 합법화하였다.

 1614∼1615년 두 차례에 걸쳐 오사카[大阪]전투를 일으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의 잔당을 완전히 멸망시켜

 대망의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여러 가지 정책을 수행하여 일본 근세 봉건제사회를 확립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1549년 아버지 노부히데[信秀]의 뒤를 이어 오와리국[尾張國: 愛知縣]의 태수가 되고,

이웃의 여러 제후를 평정하여 무명(武名)을 떨쳤다.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동맹을 맺고,

 156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막부(幕府)의 회복을 청해 왔으므로 이를 기회로 삼아 교토[京都]를 진정하고 막부를 재건해 실권을 장악하였다. 1573년에는 아시카가를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단절시켰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였으나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 ·습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전국전란의 시대에 통일의 서광을 비추어 준 전제무장(專制武將)으로 주목할 만한 여러 정책을 과감하게 실시하였다.

 구체제 ·구관습의 타파, 새 인물의 등용, 금은 광산의 경영, 화폐의 주조, 도로 ·교량의 정비, 관소(關所: 검문소)의 폐지 등

 혁신적인 정책으로 새 시대의 도래에 대응하였다.

이것을 기반으로 한 천하통일의 위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