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

[예산여행] 덕숭산 수덕사에서

실을1 2014. 8. 4. 23:05

 

서천 갈월암에서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용인 와우정사로 가는 길목의 예산 수덕사를 경유 한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주차장 근처 상가에서 점심을 매식하기로 하고 호객 행위를 받고 찾아간곳은 바로 여기

오복식당

우리는 백반 10,000원 짜리를 주문한다

 

 

찬은 정갈하고 맛있었는데  우리는 나물 종류는 한번더 추가로 요청했다

다만 된장국 맛이 어찌좀 그렇다  

점심을 먹고 주변 상가를 가로질러 수덕사 경내로 향한다

 

 

 

개상사화

 

 

 

 

 

수덕사 소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의 본사이다. 창건이나 그 이후 역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절의 연혁을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말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했다고 하며, 일설에는 백제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智命法師)가 창건하고 원효가 중수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말에 경허(鏡虛)가 선풍(禪風)을 일으킨 뒤 1898년(고종 35) 그의 제자인 만공(滿空)의 중창으로 번성하여

 현재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일주문을 지난다

 

수덕사 미술관 앞에는 예산을 상징하는 사과 조각이 있다

실내 관람은 시간관계상 다음으로 미루고

수덕여관으로 향한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로  화백의 고택으로  최초 여류화가 라혜석씨가 삼년간 머문적도 있었으며 이화백은 1988년 작고할 때 까지 머물었던 곳이다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1969년에 직접 추상문자 암각화 2점을 새기섰단다

지금은 예원형을 보전하여 문화사적전시관으로 사용 한다  

지금부터 수덕여관과  세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펴온글)

 

첫번째 여인수덕여관의 주인이자 화가 이응로의 아내 박귀희

1944년 남편인 고암 이응로 화백이 이 여관을 사들이면서 여관의 운영을 이 화가의 부인인 박귀희씨가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응로 화백은 어린제자와 눈이 맞아 부인을 수덕여관에 남겨둔 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남편과 이혼 후, 박귀희는 혼자 여관을 운영하게 된다
.
하지만 운명은 이 여인에게 슬픈 역사로 돌아온다. 동백림 사건으로 남편 이응로가 옥고를 치르고 몸을 추스르기 위해 수덕여관으로 돌아온다
.
옥바라지와 이응로를 돌본것이 조강지처였던 박귀희였다. 그러나, 이응로는 몸이 회복되자 다시 파리로 돌아가 버린다
.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이응로가 바위에 암각화를 새긴 작품이 마당 한 켠에 아직도 남아있다
.
이응로가 떠나 버린 후에도 박귀희는 이곳 수덕여관을 지키며 살다가 2001년에 숨을 거둔다

두번째 여인은  일엽스님 으로  본명이 김완주인 일엽스님은 수덕사의 여승이었다.
일엽이라는 이름은 일본 유학시절 이광수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
일엽스님이 출가하여 이곳 수덕사에 머물때 출가전 낳은 열네살 딸이 엄마 품이 그리워 일엽스님을 찾아오면 이곳 수덕여관에서 일엽스님과 딸은 상봉하여 모녀의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때 일엽스님의 친구인 나혜석이 딸을 보살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번째 여인은  불꽃여자 나혜석이다    김일엽과 동갑내기인 나혜석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신여성의 대표격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은 이혼한 뒤 친구인 일엽스님이 있는 수덕사의 이 여관에서 머물렀다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천재적인 예술성과 외모를 겸비한 나혜석은 당시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의 사회활동에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

그런 그녀가 이혼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수덕여관을 찾았고 출가하기를 원했으나 스님이 되지는 못하였다.

 

수덕여관에 얽힌 세여인의 슬픈 이야기를 안고 있는 수덕여관.
지금은 주인도 없고 모습도 그때와 다른 모습이지만 다시금 이곳을 찾게 된다면 이곳에 한이 되어 머물고 있을 세 여인의 슬픔을 위로하고 와야 겠다.

 

 

여기서 자주 나오는 동백림 사건을 알아보자(백과사전에서 펴온글)

동백림 사건(東伯林[1]事件) 또는 동베를린 사건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천상병 시인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간첩으로 지명된 교민과 유학생은 서독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대한민국으로 송환되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와 외교문제를 빚기도 했다.

1967년 12월 3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여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2006년 1월 26일에,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히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해탈문(금강문)으로 향한다

'수덕사 여승으로 유명한 ' 일엽 스님의 아야기를 블로그에서 찾아 옮겨본다

 

  스캔들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숨겨진 선객(禪客)이었다.

 주인공은 일엽(一葉·1896~1971) 스님. 최초의 한국 근대 여성 화가였던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1910년대 일본 유학,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시대상에 맞선 자유연애, 수덕사 만공 스님을 만난 후의 출가와 수행.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당대의 여걸이다
.

 오죽하면 그를 모델로 ‘수덕사의 여승’이란 유행가까지 나왔을까.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이 노래 탓에 수덕사는 한동안 ‘비구니 사찰’로 오해를 받았다. 수덕사 사하촌에 ‘수덕사의 여승’ 노래비가 세워진 적도 있다.

 사찰 앞에 어울리지 않다고 본 스님들이 없앴다고 한다.

 ‘일엽’은 늘 연예 뉴스의 초점이었다. 그 뒤에 숨겨진 ‘수도자 일엽’ ‘선객 일엽’은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다.

 16일 서울 인사동에서 일엽 스님의 4대 손자뻘 제자 경완 스님을 만났다.

그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을 하나씩 꺼냈다.

 거기에는 날이 시퍼런 일엽의 구도심과 선()적 안목이 깃들어 있었다.

 경완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일엽 스님이 30년간 입승(선방의 반장)을 맡았다”고 말했다.

견성암은 국내 첫 비구니 선원이다.

“일엽 스님은 앉아서 주무실 때가 많았다.

 정확한 기간은 모르지만 꽤 오랫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잘 때도 눕지 않고 좌선함)를 하셨다고 한다.

 신여성 김일엽은 당대의 작가였다.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춘원 이광수가 그에게 ‘일엽(一葉)’이란 필명을 지어줬다.

 그런 일엽도 출가 후에는 펜을 꺾었다. 거의 30년 만에 다시 글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내가 남과도 연결돼 있다.

그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 이치를 전하기 위해 다시 글을 쓴다.

” 여기에는 나와 세상이 함께 숨을 내쉬고, 함께 들이마시는 불이(不二)의 안목이 녹아 있다.

 경완 스님은 숨은 일화를 또 꺼냈다.

해방 전, 북쪽에서 가장 유명한 선방이 금강산 마하연이었다.

 일엽은 스승 만공 스님을 따라 그곳에 갔다.

 만공은 근대의 대표적 선지식 경허의 맥을 잇는 선사다.

 하루는 만공 스님이 일엽에게 농을 던졌다.

 “밤새 어느 방을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늦었나?” 일엽 스님은 태연하게 침묵으로 답했다고 한다.

 언뜻 들으면 성()적인 농담으로 들린다.

좀 더 들여다보면 상대의 공부를 가름하는 선문답이다.

 ‘어디서 헤매다가 이제야 자신을 찾아왔나?’라는 물음에 ‘헤매던 그 자리와 내가 선 이 자리가 둘이 아니다.

 올 것도 없고, 갈 것도 없다’는 답을 침묵으로 던진 셈이다.

 만공 스님은 그런 일엽의 공부를 인가했다.

 그리고 ‘도엽(道葉)’이란 법호를 내렸다.

 ‘세존의 견명성(見明星) 오도(悟道) 소식에’라는 일엽 스님의 게송이 있다.

 ‘예 이제 같은 별이 새삼스레 밝았으랴/밥상의 밥을 보고 밥인 줄 뉘 모르랴/다만 별빛의 꿈 돌려서 처음의 빛 얻음이라.

’ 일엽 스님은 꿈 속의 밥, 꿈 속의 별을 허물었더니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빛나는 밥과 별이 있더라고 노래했다.

 비구니가 아니라 비구였다면 그의 선사적 면모가 이토록 오래 숨겨져 있었을까.

 말년에 건강이 악화됐다.

수덕사의 환희대란 암자에서 요양하다가

“나는 갈 때 대중처소에서 가고 싶다”며 평생 수행했던 견성암으로 옮겼다.

 ‘일엽 스님이 위독하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을 보며 스님은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 가서 정진하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일엽 스님이 출가 후 30년 만에 썼던 책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다.

 최근 미국 하와이대 출판부에서 영문판으로 출간됐다.

◆일엽 스님=1896년 평남 용강군 출생. 부친은 개신교 목사였다.

가족을 모두 잃고 17세에 혼자 남았다.

외할머니 뒷바라지로 이화전문 졸업.

 1919년 일본 도쿄의 영화학교에서 유학했다.

 귀국해 시인·수필가·평론가로 활동하다 1933년께 출가했다.

 1971년 입적했다.

 

 

건성암선원 가는길이 있다  

사천왕문을 통과  더높은 곳으로

내부 ㅅ천왕상은 언제봐도 무섭다

우리 손녀가 나중에 보면 바로 울겠는데?

 

황하정루를 지난다

1931년에 세우진 수덕사 7층석탑이다

 

 

코키리 석등

 

 

 

드디어 대웅전 본 마당에 도착한다

백제 사찰의 하나인 수덕사는 그연대는 알수 없다고 한다

  다만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때 창건던 것응 확실하단다  

넓은 마당과 시원한 조망이 마음 까지 뻥 뚤어주는것 같다

석가 약사 아미타  3불을 모신 대웅전 

 

 

신라 문무왕때 건립되었다는 3층 석탑

 

 

2000년도에 세워진 금강보탑

 

 

 

거대한 황하정루가 특이하게 눈에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