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옥천 육씨(沃川陸氏) 시조 및 본관 유래

실을1 2013. 2. 14. 16:10

옥천 육씨(沃川陸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옥천(沃川)은 충청북도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신라 초기에 고시산군(古尸山郡)이라 불렸으나 통일 이후 경덕왕(景德王) 때에 관성군(管城郡)을 고쳤고 고려 현종 때에는 경산부(京山府)에 예속되었다가 인종(仁宗) 때에 현(縣)이 되었다. 1181년(명종 12)에 일시 폐현 되기도 하였으나 1313년(충선왕 5) 주(州)로 승격, 옥주(沃州)라 했고 경산부의 소속인 이원 (伊源)·안읍(安邑)·양산(陽山)의 3현을 받아들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옥천으로 개칭하고 관할도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변경하였다.
1895년(고종 32)에는 군이 되었고, 1914년에는 신라시대에 굴산현(屈山縣)·기산(耆山)으로 불리었던 청산군(靑山郡)을 병합하고 학산면(鶴山面)·용화면(龍化面)·양산면(陽山面)은 영동군(永同郡)에 이관하였다. 1929년에는 이내(伊內)·이남(伊南) 두 면을 합하여 이원면(伊院面)으로 하고 청서(靑西)·청남(靑南) 두 면을 합하여 청성면(靑城面)으로 개편하였으며 1949년에는 옥천면이 읍(邑)으로 승격하였다. 육씨(陸氏)는 중국(中國) 하남성(河南省) 평원반군(平原般郡) 육향(陸鄕 : 육종)의 지명(地名)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육씨(陸氏)와 연원(淵源)은 「옥천육씨대동보(沃川陸氏大同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옥천 육씨(沃川陸氏)의 시조(始祖) 육 보(陸 普)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서기 927년(통일신라 경순왕 원년, 고려 태조 10) 당(唐)나라 명종(明宗)이 문학전례지신(文學典禮之臣)을 뽑아 신라에 선교사(宣敎師)로 보낼 때 홍은열(洪殷說)·정 한(鄭 ) 등과 함께 8학사의 한 사람으로 동래(東來)하여 뛰어난 공적을 쌓아 경순왕(敬順王)의 부마(駙馬)가 되었고 관성(管城 : 옥천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충청북도 옥천((忠淸北道沃川)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육 보(陸을 普 )를 시조(始祖)로 하고 옥천(沃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중간 계대(繼代)를 신전(失傳)하여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주부(主簿)를 역임한 인단(仁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옥천 육씨(沃川陸氏)는 일세조(一世祖)인 인단(仁端)의 손자(孫子) 거원(巨遠)이 고려 말(高麗末)에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고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명성을 떨쳐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맏아들 려(麗)는 덕곡공파(德谷公派), 둘째 항(沆)은 공주목사공파(公州牧使公派), 셋째 비( )는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 넷째 수(綬)는 낭장공파(郎將公派)로 크게 갈라졌고, 막내인 태귀(台貴)는 손자대(孫子代)에서 후손이 끊겼다.
각 파별(派別)로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열거해 보면, 덕곡공파(德谷公派)의 려(麗)는 고려 말에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왜적(倭賊)을 격퇴하는 데 공(功)을 세워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절개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충남 공주(忠南公州) 덕리(德里)에 은거(隱居)하였다. 그의 손자(孫子) 명산(命山)은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했으며 후대에 내려가 다시 석동계(石同系)와 석정계(石貞系)로 나누어져 조선조(朝鮮朝)에서 충의(忠義)의 전통을 이었다.
목사공파(牧使公派) 항(沆)의 맏아들 진(晉)의 후손에서 부위(副尉)를 지낸 저(渚)와 제주 목사(濟州牧使) 한(閑), 동래 현감(東來縣監) 세영(世英), 조선(朝鮮) 정조(正祖) 때 유학자 상지(相贄) 등이 있고, 둘째 상(常)의 후손으로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춘수(春秀), 만호(萬戶) 석(碩)과 선조(宣祖)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성우(成禹) 등이 있다.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는 비( )의 아들 애(涯)가 참판(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두 아들 지 ( : 부사를 역임)와 헌(軒 : 참봉)의 대(代)에서 다시 두 파로 갈라졌다. 낭장공파(郎將公派)는 조선 명종(明宗) 때 장사랑(將士郞)을 지낸 한종(漢宗)과 선조(宣祖)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역임한 붕(鵬)이 대표적이며, 숙종(肅宗) 때 학자 홍(鴻)은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저서(著書)로 「석정유고(石亭遺稿)」를 남겼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옥천 육씨(沃川陸氏)는 남한(南韓)에 총 4,341 가구, 18,023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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