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

[예산여행]추사고택

실을1 2020. 7. 3. 14:06

 

아산 외암마을에서 능소화 출사를 마치고 당진의 장고항 노적봉을 보기 위해 가는 길목에 있는

예산의 추사고택에 잠시 들른다

 

 

 

추사 고택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가인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고택은 솟을 대문의 문간채, ㄱ자형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옥이다.

이밖에도 추사 선생의 묘소와 증조부이신 김한신과 부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 그리고 화순옹주 열녀문 즉,홍문이 있다.

 

 

사랑채
안채
추사영당

 

추사선생의 영정이 모셔저 있는 추사영당

 

 

추사 묘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과 특히 서도를 인정받아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소동파·안진경 등의 여러 서체를 익히고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추사 김정희

 

조선조의 훈척 가문의 하나인 경주 김씨 병조판서 김노경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 앞으로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으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김정희에 의해 발견된 진흥왕순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