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

[인천여행]인천항 전망의 백미 월미도전망대

실을1 2019. 10. 13. 09:54



'ALLWAYS INCHUN'

모든길은 인천으로 통한다


하늘길, 바닷길,기차길,버스길, 도보길


그중 바다길인 인천항을 전망할 수 있는 월미도 전망대를 올라 본다


월미공원에서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여러개 있으나 오늘은  물범셔틀카로 오른다(편도 1.000원)



7부두와 기내스북에 오른  대형싸일로 벽화


내항과 국제여객터미널







외항



내항 파노라마

내항, 남항 파노라마


월미 테마파크 놀이공원과 문화의 거리


인천항 개요


서울의 관문이며, 국내 최대 공업지대의 하나인 경인공업지대와 중부지방을 세력권으로 하는 서해안 제일의 무역항이다.


인천항은 조선 초기에는 제물포란 이름으로 불리던 우리나라 유일의 군항으로 서해의 수비를 맡던 군사 요충지였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지역이며, 서울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조선측의 강한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제물포조약)에 의해 1883년(고종 20) 부산항·원산항에 이어 인천군 다소면의 일부인 제물량 일대의 성창포가 강제로 개항되었다. 1884년 조선정부는 해운국을 설치하고, 독일에서 500~1,000t급 기선 3척을 인천항에 도입해 연안항로를 개척했다.

이어 1912년 인천과 군산항·남포항을 잇는 정기항로를 개설했다. 또한 조수간만의 극심한 차를 해소하여 전천후 하역작업이 가능한 항만시설을 갖춘 근대항의 건설을 위해 항만시설 개선계획을 수립하고, 항구를 가다듬는 공사를 벌였다. 1911~18년에 동양에서는 보기 드문 갑문식(閘門式) 제1독(dock)이 건설되었다.


1935년부터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8,000t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제2독 건설을 시작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부 기초공사만을 진척한 채 중단되었다. 그후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추진으로 인천항 제2독 건설계획이 수립되고 추진되었다.


1966~74년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갑거(閘渠)를 축조, 구항로를 없애고 인천 내항 전체를 선거화했다. 내항의 독은 동양 최대이며, 세계에서 3번째로 크다. 갑문은 모두 2개인데 하나는 5만t급 선박 1척이, 또 하나는 1만t급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초현대식으로 건설되고, 연간하역능력은 1,000만t(972만 8,000t)에 이르러 4배나 증가되었다. 계속해서 1975~78년의 인천항 1단계개발사업, 1981~85년의 인천항 2단계개발사업을 추진하여 항만부대시설인 도로 및 야적장의 포장, 입항 유도시설과 화물 보관시설 등을 건설하여 국제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당시의 인천항은 외항과 내항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외항인 월미도 서측 해면에는 항로를 겸한 외항 묘박지(錨泊地) 29기가 있어 대부분의 대형 선박은 이곳에서 해상 이중 하역을 하고 있다. 내항은 제1잔교 전면 정박지로 가용 면적은 0.5㎢ 에 불과하며, 수심도 소형선이 정박할 정도였다.

종전 후 인천항은 1974년 갑문 선거가 완공되면서 그해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부두인 ‘내항 4부두’가 개장하는 등 항세가 급속히 성장하였다.


주요 항만 시설로 인천항 갑문은 최대 5만톤급 선박이 입출거할 수 있으며, 갑문식 도크로는 동양 최대규모이고 인천항이 4개의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기 여객항로는 인천∼제주를 포함하여 5개 항로, 낙도 보조항로는 인천∼대난지 구간의 1개 항로가 운영되고 있다. 국제여객선은 중국의 단둥·옌타이·칭따오 등 10개 항로가 운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