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걷기

[서울여행]전통과 현대를 품은 익선동과 인사동 한옥길 걷기

실을1 2019. 3. 10. 15:18




단성사와 좌포도청터




동학 제2교주인 최시형이 순교한 곳



조선조 중종39년(1544년)좌포도청은 서울 동부,중부, 남부와 경기좌도를 관활하고

우포도청은 현 종로종로1가에 위치하여 한성부의 서부, 북부, 경기 우도를 관활하게 했다  




단성사

서울시 종로구 묘동에 위치해  있는 단성사는  1907년 주승희의 발의로, 안창묵·이장선이 합자해 2층 목조건물을 세웠고 .

 한일합병 때 일본인 후지하라[藤原雄太郞]에게 넘어갔다.

 1910년대 중반에는 광무대를 경영하던 박승필이 인수했다.

처음에는 주로 자선공연을 했는데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1908년 10월에 문을 닫았으나 곧 개관했고,

 극단 혁신단·유일단·신극좌 등이 이곳에서 〈오호천명 嗚呼天命〉·〈육혈포강도〉·〈혈의 누〉 등을 공연했다.

 1924년에는 한국 최초로 한국인에 의한 극영화 〈장화홍련전〉이 제작·상영되었고,

1926년에는 나운규의 민족영화 〈아리랑〉을 상영해 화제가 되었다.

1940년 대륙극장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후 단성사로 환원되었다.

 그뒤 주로 악극이 공연되었으며, 6·25전쟁 이후 몇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은 영화전용극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광복 후 

겨울여자, 장군의 아들 , 서편제 등 주옥 같은 한국영화 관객응 동원 한 곳이기도 하다

종로 3가 4번 출구에서 부터 익선동 투어가 시작된다

입구에 위치한 익선교자

마침 점심 먹어야할 시간이기도 하고 불친구의 소개도 있고 해서 이곳에서 요기하기로 한다

이런 만두 8개에 10,000원


내가 고른 이것 저것들

내입맛이 그런가?  군만두는 조금 느끼한 맛이 난다......

전반적으로 조금은 실망

벽에 붙어 있는 만두 맛있게 목는 방법




요즘 떠오르는  핫한곳  익선동 (다음 백과에서 펴온글)

 

익선동 동명은 1914년 동명 제정 때, 조선시대부터 이곳이 한성부 중부 정선방 관할의 동리인 익동이었으므로 익동에서 자를 따고,

 정선방에서 자를 따서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익선동은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1396) 41일 한성부 5부 방명의 표지를 세울 때 한성부 중부의 정선방에 속하였으며,

영조 27(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는 중부 정선방의 돈녕부상계와 돈녕부하계로 기록되어 있었다.

 1895년 윤51일 칙령 제98호로 한성부 中署 정선방 돈녕계의 돈녕동한동익동루동궁동니동 지역이었다.

 1910101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한성부 중서에서 경성부 중부로 바뀌었고,

19114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개편된 중부 정선방의 궁동익동돈녕동과 니동한동 일부 지역이

 19144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따라 새로 통합되면서 익선동으로 칭하였다.

같은 해 929일 경성부조례 제8호로 북부출장소의 관할에 속하고 이듬해 61일에는 북부출장소의 폐지로 경성부 직할이 되었다.

19364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 관할구역이 확장되고 경기도고시 제32호로 동 명칭이 개정될 때 경성부 익선정이 되고,

 19436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한 區制度 실시로 종로구가 신설되면서 경성부 종로구 익선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101일 서울시헌장과 미군정법령 제106호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익선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후 골목길을 따라 인파를 해치고 간간이 서터를 누르면서 걷기를 진행한다  
























































익선동 한옥길 구석구석에서 빠져나와 큰길로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가 줄줄이 주차되어 있다   


익선동에서 인사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만난 박물장수  



인사동 거리












오랫만에 방문한 쌈짓길







































안국역을 돌아서 운현궁으로


운현궁


사적 제257. 고종의 등극으로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사가를 증축하여 운현궁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등 개혁사업을 추진했으며,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이 궁에서 납치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당시 운현궁에는 창덕궁과 가깝게 왕래할 수 있는 임금 전용의 경근문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이 있었고,

 담장 안에는 아재당, 안채인 이노당·노락당이 있었으며, 선조인 은신군과 남연군의 사당과 영화루도 있었다.

 

현재는 덕성여자대학교에서 궁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으며,

전 동양방송(TBC) 방송국에도 일부를 넘겨주어 대원군이 즐겨쓰던 아재당이 헐려 나가,

지금은 사랑채인 노안당, 안채인 이노당·노락당 만이 남아 있다.

 덕성여자대학교 교사로 쓰이는 양옥집은 1910년 이후 대원군의 손자 준용의 거처였으며, 일본인이 지은 건물이다.

 

운현궁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건물이며 정원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내정에는 아직도 고종이 소년시절에 오르던 노송이 있어, 2품 금관자를 달아주고 대부송이라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