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

[여주여행]천년 고찰 여주 신륵사

실을1 2017. 2. 13. 19:46



일요일  날씨가 조금은 풀린듯 하다 

산행을 자재하고 있던 터라  차로 다녀올 곳을  물색하다  아직  한번도 제대로 가보지 못한  여주를 선택하여

폭풍 검색해본다


오늘의 여주 여정은  신륵사, 세종대왕릉인  영릉, 그리고 남한강을 따라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되어 있는 

강천보, 여주보, 이포보를 승용차로  다녀오기로 결정 한다 


아내는 큰딸 둘째 낳을 준비차  대전으로 내려가 기로 예정되어 있어  나 혼자 카메라 가방을 매고  여주로 GOOOOOOOOO


          

여주 국만관광단지 주차장에  차를 파킹한다

오늘 여정을  여주 관광 지도에서 다시한번 확인 해본다

도자기 고장 답게  도자기, 민속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즐비 하다



신륵사로 가는길에 여주 도자 명품관이 있는데  이곳은  시간 관계상 오늘은 생략  


봉미산 기슭의  신륵사 일주문을 지난다  

입장료는 2,000원



신륵사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했다는 설이 있다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났는데, 이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년)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이 되었고,

 1472년(성종 3년)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년)에는 계헌)이, 1702년(숙종 28년)에는 위학·천심 등이 중수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가 내탕전을 희사해 중수했다.


현존하는 건물은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조사당(보물제180호)·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칠성각·종각·구룡루·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다층석탑(보물 제225호),다층전탑(보물 제226호),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보제존자석종앞석등(보물제231호)등과 같은 문화재가 많이 있다


강가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   무얼 하는지 내려 가본다




정월 대보름 방생제를 지내고 있었다


강가로 내려 가서  길따라 가니 일출 명소인 강월헌으로 연결되어 있다  





일출 명소 및  갸울철엔 상고대로 유명한 곳인데 ....

나도 언제 출사 한번  와야 겠다








보물 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6호. 높이 940cm. 한강변에 있는 암벽 위에 건립된 것으로,

 지대석 위에 화강석으로 된 7층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높은 6층의 탑신부가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받침을 마련한 것은 신라시대의 전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는 6층 부분만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뿐 각 층의 체감률이 낮아 전체적으로 고준해 보인다.








대장각 기비

보물 230호 로  







구룡루


대응전




공양미의 의미를  읽어 본다


삼성각

조사당(보물180호)




보제존자석종

보물 제228호. 높이 190cm. 1376년 나옹이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서 경상남도 밀양으로 돌아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자

 1379년 각신과 각주가 절의 뒤편에 있는 봉미산 중턱에 묘역을 마련하고 나옹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넓은 묘역을 마련하고 전면에 박석을 깔았으며, 그 위에 넓은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놓여 있는 2매의 판석 중앙에 석종형 부도를 안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