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걷기

한성대역에서 길상사 와룡공원, 북촌마을을 거쳐 광화문역 까지

실을1 2014. 2. 10. 10:45

 

 

토요일 흐리고 약한 눈이 내려 둘레길 산책하면 좋을 듯하여  파란별님 내외와 우리 내외 넷이서   오전 10시에 부천역에서 만나 북악산 하늘길을 가기로 정하엿다

한성대역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겹쳐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우선 길상사를 목표로 성북동 길을 걸어 길상사를 찾아 길따라 걸어 본다  

이곳 골목길 대부분은 주한 외국 대사관저가 밀집으로 분포되어 있고 화장님 사장님 들의 저택이 많아 외관들이 탄성를 자아낸다

역시 부자집 동네는 역시 달라도 다르다

 

 

 

 

 

 

 

 

한성역에서 출발하여 약 30분 만에 길상사에 도착한다

 

 

1997년  거듭난 길상사는,

 1970년대 밀실 정치의 대명사이자 향락의 상징이었던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었다.

 

열 여섯의 나이에 기생이 된 진향(본명 김영한 1916~1999)은 22세 때 평생의 연인이 된 천재시인 백석과의 만남.

몇 년 간 열애를 나누었지만 기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해방과 분단으로 인해 북한에 건너가 생을 마감한 시인 백석.

두 사람은 살아생전 다시는 만날 수 없었고, 홀로 남은 그녀는 공부에 매진하다

1950년대 성북동 인근의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한식당을 열어 1970년대 밀실 정치가 극에 달하던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87년, <무소유> 철학을 접하고 대원각을 법정스님에서 시주하기로 결심하게 된 김영한은

10년 간의 간청 끝에 대원각을 송광사의 말사를 거쳐 ‘맑고 향기롭게 길상사’ 로 개산하게 된다.

 

기생 진향 그리고 백석의 연인 자야, 김영한.

 

 

 

천 억 재산도 백석의 시 한 줄에 비길 수 없다며 평생의 그리움을 세상에 알렸던 그녀의 영혼은 눈이 많이 오던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고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남겨진 유일한 이름은 길상사 창건 공덕주 길상화였다.

 

 김영한金英韓(1916-1999) :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열여섯 살 때,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1936년 항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청년 시인 백석白石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89년 백석 시인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에는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에는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펴냈다.

 

김씨는 지난 1951년 서울 성북동 청암장을 인수해 '대원각'으로 개명, 국내 3대 요정의 하나로 키워냈다.

 

과거 고급 요정의 대명사였던 서울 성북동 대원각(당시 1000억원을 호가)을 법정스님에게

 

조건없이 시주해 길상사吉祥寺로 변신케 했다.

 

  백석白石(1912-1996) : 시인.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

 

평북 정주 출생. 1929년 오산고보 졸업 후 도쿄 아오야마학원에서 영문학 수학

 

1934년 조선일보 출판부 입사 《女性》지 편집.

 

1935년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옴.

 

1936년 시집《사슴》간행. 《백석시전집》이동순 편(창작과비평사 1987).

 

 

무소유 법정스님의 글이란다

 

여기 침목의 그늘에서 그대를 맑히라

이부드러운 바람결에 그대 향기를 실으라

그대 아름다운 강물로 흐르라

오 그대안 저 불멸의 달을 보라

 

 

관음 보살상은 일반 불상과는 달리 카토릭 풍인데 샐제로 카톨릭 산자가 조각한것이란다

길상사 개원식때  법정스님과 김수환 추기경님이 함께 참석하였단다  

 

 

 

 

 

 

내가 백석이 되어 -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의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 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 백석과 자야 · 1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 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 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1000억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 문학 할 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이번에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 데는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이룰수 없는 애절한 사랑의 전설이 남아 있는  길상사를 뒤로 하고 대사관저가 있는 길따라 계속간다  

 

 

그러나 원래 우리가 가야할  북악재로 가야하나  길따라 가다  잘못들어  북악 하늘길을 가지 못하고 말았다  

눈가지고 장난치지마

 

 

 

 

아내도 한번 해본단다

 

결국 생각지도 못한 삼청각에 도착한다 이곳도 유명한 밀실정치의 산실인 요정이였다 

 

 

 

겨우 등로를 찾았으나 서울 성곽과 하늘길을 거꾸로라도 탐방하려니

 신분증이 있어야 한단다   한사람이 신분증이 없어  할수 없이 와룔공원쪽으로 가기로 하고 등로를 수정한다 

 

 

원래 우리가 가야할 하늘길인데 할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해본다

 

 

 

 

 

 

 

 

 

와룔공원에서 산행 트래킹은 완료한다

 

성균관대를후문을 둘러 통일부를 거쳐 북촌마을에 도착한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전통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 주거지역이다.

그리고 많은 사적들과 문화재, 민속자료가 있어 도심 속의 거리 박물관이라 불리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North Villag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진 이곳은, 이름도 정겨운 가회동과 송현동, 안국동 그리고 삼청동이 있다.

사간동, 계동과 소격동 그리고 재동에는 역사의 흔적이 동네이름으로 남아 수백년을 지켜온 곳이기도 하다.


 

 

 

 호떡집에 들러

이 호떡 먹다 뜨거운 설탕물에 입을 디었다  

 

 

 

 

 

북촌의 문화유산 현황(퍼온글)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조선시대 양반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던 유서 깊은 지역이다.
북촌지역의 역사적 자료는 사적5곳, 서울시 민속자료 4곳, 유형문화재 3곳, 문화재자료 1곳

이외에 계동길, 석정보름우물과 광혜원터 등이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탕인 중앙탕 등 흥미로운 장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형성되었던 옛길과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고,

1900년 이후부터 급속하게 형성된 한옥군 등 많은 자원들이 분포되어 있다.
1750년 도성도, 1892년 수전전도, 1927년 경성시가도, 그리고 2000년 이후인 현재 지도까지를 살펴보면

계동길, 가회로, 삼청동길, 창덕궁길 등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많은 역사유적들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경복궁과 마주하고 있는 삼청동길 주변에는 많은 갤러리가 늘어서 있고,

화동길과 더불어 각종 먹거리 자원과 특색 있는 카페가 자리잡고 있으며,

원서동에는 전통 기능의 보유자 및 예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최근에는 건축가, 미술가들이 북촌의 역사성 속에 함께 하고자 북촌 내부에 작업실과 사무실 등을 개설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들은 북촌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와 내용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현상이기도 하다.

 

 

 

 

 

 

 

 

 

 

북촌 전망대 따라 찾아가니 3층 영업장소이고 입장료가 3000원이다 

3000원이면  소주가 한병인데 ?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 왔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사회, 경제상의 이유로 대규모의 토지가 소규모의 택지로 분할되었으며,

 지금 볼 수 있는 어깨를 맞댄 한옥은 1930년도를 전후하여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한옥형식의 변화는 도심으로 밀려드는 인구들로 인해 고밀도화 되어가는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시대로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 유적과 문화재들은 이 지역을 찾는 이들에게 이 지역의 역사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북촌마을에서 경복궁쪽으로 향한다

경복궁내의 한국 민속박물관은 무료 입장이여 한번 둘러본다

 

 

 

 

광화문에 도착  오늘의 트래킹을 마무리한다

 

오늘 걸어간 길을  괘적해보니